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루살렘 왕국 (문단 편집) ==== 계속되는 [[모계 성 따르기|모계 계승]] ==== 애므리는 과량의 흰색 숭어를 먹은 후, 중세 왕들의 고질병인 심각한 [[이질]]에 걸렸다. 그는 1205년 4월 1일에 4일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병마와 싸우다 굴복하고 사망했다. 그의 전처가 낳은 여섯 살짜리 아들은 [[키프로스 왕국]]을 성공적으로 상속받고 예루살렘과 키프로스 두 왕국의 결합은 실패로 돌아갔다. 또다시 과부가 된 이사벨라는 1205년 4월 5일 역시 4일이라는 짧은 단독 통치를 하다가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으로 풀크 이래 이어져 내려오던 앙주 가문의 부계 혈통은 단절되었고 코라도의 딸 마리아가 예루살렘 여왕이 되었다. *''' 마리아 & 장 1세 ''' 이사벨 1세의 죽음으로 마리아는 13세에 예루살렘의 여왕이 되었다. 그녀의 의붓 동생 위그는 아모리 2세의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자식으로 마리아의 등극과 거의 동시에 키프로스의 왕이 되었고 마리아의 이복 여동생 알리스 드 샹파뉴와 결혼했다. 어린 마리아는 베이루트의 영주 장 디블랭(John d'Ibelin)의 섭정을 받게 된다. 그는 발리안 디블랭과 동로마 제국의 마리아 콤네네 사이의 아들로써, 아모리 1세와 마리아 콤네네 사이의 딸인 이사벨 1세의 이부(異父) 동생이었다.즉 어린 여왕 마리아의 외숙부인 그의 동로마 제국 혈통은 그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다. 그는 아모리 2세를 암살하려는 시도로 고소당한 후 왕국에서 추방당했던 갈릴레아 공작 라울과 왕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하여 라울의 처형을 모면하게 하는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는 섭정으로서 현명하게 왕국의 거주자들에게 만족을 주며 잘 통치했다. 1187년에 잃어버린 영토에 대한 수복 활동을 금지하여 아이유브 제국의 알 아딜과의 평화 정책을 기반으로 평화로운 왕국을 유지했다. 하지만 예루살렘 왕국은 과거의 위용을 잃고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현실이 그들을 구했다. 쇠약한 왕국이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못했으므로 오히려 무슬림들이 평화 협정을 맺으며 내버려두었다. 이슬람교는 이제 기독교의 갸날픈 목을 조르면 또 다시 유럽에서 대규모 십자군이 일어나는 어그로를 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대신에 다르게 생각하면 기독교 국가라는 존재가 레반트 지역에 성지순례라는 경제적으로 좋은 기회를 지속적으로 주었으므로, 알 아딜은 이를 기꺼이 이용했다. 섭정 정치는 마리아가 17살 때인 1209년에 만료되었으므로 의회는 마리아를 결혼시켜 앞날을 도모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믿었다. 영주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회의에서 구혼 사절단을 유럽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서유럽에서 결혼 적령기에 있던 많은 귀족들은 더 이상 그 청혼에 마음이 끌리지 않았는지 무려 2년이나 진척이 없었다. 끝끝내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후보자로 추천한 게 필리프의 추종자 중 한 명인 장 드 브리엔(John de Brienne)이었다. 이렇게 찾아낸 후보는 그다지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장은 권력도 금전도 가지지 않은 처지였고 무엇보다 나이가 환갑인 60세였다. --이사벨 때의 콘라드 꼴을 보고서도 배우지 못한 모양-- 그래서인지 필립과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장의 재산 부족과 나이를 극복하고 왕으로써 자신의 주권적 의무인 법원과 군대를 통솔할 수 있도록 그에게 40,000리브의 금전적 원조를 결정했다. 장은 9월 13일 아크레에 도착하여 결혼은 다음날 거행되었으며, 그 후 부부는 1210년 10월 3일에 티레의 대성당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마리아 여왕과 왕 장 1세로 즉위했다. 장은 장 디블랭의 평화 정책을 계승하여 왕국이 회복되도록 적절히 이끌었다. 군사 기사단과 특히나 합이 잘 맞았는데, 그들은 장의 노련한 처세술과 지혜에 깊은 감명을 받고 존중하게 되었다. 장은 무슬림과의 평화 정책을 대외적으로 추구하면서도 성지에 또다른 십자군을 요구하는 편지를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보냈다. 그러전 중 1212년, 마리아는 딸 욜랑드(Yolande)를 낳았으나 곧 출산 후 발열로 사망해 버린다. *''' 이사벨 2세 & 장 1세 ''' 마리아의 외동딸 욜랑드는 아직 핏덩이의 갓난 아기였지만 의회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이사벨 2세로 선포되었다. 장은 딸이 이사벨 2세로 등극하자 이사벨 2세의 공동 왕 지위까지 섭정하여 왕국의 사실상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자 배 아픈 전 섭정 장 디블랭이 그를 끌어 내리려고 시도했다. 곧바로 법적 분쟁이 터졌고 장 1세는 교황청으로 시돈의 주교 라울 드 메렝쿠르(Raoul de Mérencourt)를 파견하여 교황을 설득했다. 그리하여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1213년 초, 장 1세를 예루살렘 왕국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결정하고, 의식과 관련 문서를 동봉하고 사신으로 온 티레의 주교 라울을 때마침 공석이 된 예루살렘 총대주교로 임명하며 필요할 경우 교회의 권위로 장을 지지할 것임을 선포했다. 대부분의 예루살렘 성주들은 장 1세가 그의 딸을 대신하여 왕국을 관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면서 장 1세에게 충성하는 편이었다. 입지가 심각하게 좁아진 장 디블랭은 성지를 떠나 키프로스 왕국으로 망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